[한겨레] 대형참사 트라우마로 가득찬 거대 병동, ‘한국호’
대형 사고 반복되니 사회 전체 집단 우울증
한국 사회, 환자로 가득 찬 거대 병동되가나
바다는 집어삼킬 듯했다. 23명이 파도에 휩쓸렸다. 발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허우적대면서도 친구 2명을 뭍 쪽으로 밀어냈다. 그때 누군가 내 목을 확 붙잡았다. 내 몸도 이미 힘이 빠진 상태였다. 어쩔 수 없지만 뿌리쳤다. 지금도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그냥 왠지 걔가 죽은 5명 중 하나였을 것만 같다.
지난해 7월 충남 태안군 안면도에서 일어난 ‘해병대 캠프’ 사고를 겪은 한 고교생은 한동안 우울증과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당시 학생들의 심리치료에 참여했던 이소영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홍보이사가 전해준 이야기다. 삶과 죽음의 경계, 그것도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오는 ‘생지옥’의 경험은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남기 쉽다. 이 이사는 “특히 경험이 부족해 통합적인 사고가 어려운 청소년기에는 치명적이다. 세상을 불신하거나 가치관에 혼란을 겪는 등 인격 발달에도 영향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언론에 노출되면서 ‘2차 외상’
이번에도 또 학생들이다. 진도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의 2학년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희생됐다. 수학여행을 함께 떠났던 학생 325명 가운데 천운이 닿아 구조된 사람은 75명(4월18일 현재)뿐이다. 살아남은 자는 벌써 고통에 짓눌리고 있다. 구조된 학생 상당수가 입원한 고려대 안산병원 쪽은 지난 4월17일 기자회견을 열어 “환자 대부분이 심각한 스트레스와 불안을 호소하는 등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와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도 이날 성명을 내어 “대형 참사는 신체적인 외상뿐 아니라 정신적인 외상을 일으킨다. 생존 학생과 유가족 등을 위한 포괄적인 치유 프로그램이 장기적으로 지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학생들이 자꾸 언론에 노출되는 것이 ‘2차 외상’을 남길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전문용어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또는 트라우마. 세월이 지나도 분노와 슬픔의 기억은 문득문득 목까지 차오를 것이다. 사고 때 겪은 일들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를지도 모른다. 쉽게 놀라거나 짜증이 늘어날 수도, 사고와 관련된 대화 자체를 피할 수도 있다. 2016년 졸업앨범을 보다가, 듬성듬성 친구들의 빈자리가 느껴져 울컥할 게다. 생존 학생들만이 아니다. 가족을 떠나보낸 유가족도, 재난 구조에 참여했던 소방관이나 잠수부, 이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공무원과 언론인들도, 재난 보도를 접하며 분노와 혼란을 경험 중인 불특정 다수도 모두 피해자다.
다행히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정신의학 전문의들이 나섰다. 고려대 안산병원과 진도 팽목항 현지에 전문의·임상심리사 등으로 구성된 심리지원팀을 보내, 학생들과 유족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겠다고 했다. 교육부는 단원고 전체 학생과 교직원들에게, 보건복지부는 학부모와 지역주민한테 앞으로 한 달 이내에 최소 1차례 이상의 심리지원 서비스를 실시한다. 지난 4월17일 저녁 단원고 운동장에 모인 학생 700여 명은 ‘기다릴게’ ‘무사히 돌아와줘’라고 손글씨로 적은 종이를 한 장씩 들고 흐느꼈다. 상처는 이미 단원고 2학년을 중심으로, 학교 전체로, 안산 지역 전체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고 있다.
소방방재청 센터 고작 2천여 명 이용
그동안 한국 사회를 할퀴고 간 대형 사고는 많았다. 멀게는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부터 가깝게는 지난해 해병대 캠프와 올 초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 사고까지. 그러나 사회가 트라우마에 주목하기 시작한 건 몇 년 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나가는 순간 현기증을 느끼고 쓰러진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부엌 주방기기를 보고는 비명을 지르고 공포에 지른다.’ 대구지하철 부상자들을 10년 넘게 면접조사해온 최남희 서울여자간호대학 교수(서울내러티브연구소 소장)가 전하는 생존자들의 상처는 깊다. 최 교수는 “대구지하철 사고 때도 그랬지만 우리나라는 치료비와 위로금으로 피해 보상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반면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전 국민이 힘을 합쳐서 생존자들이 일상 생활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줬다. 충격적인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지 않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져야 진짜 치유가 끝난 거다. 마음을 좀더 강건하게 만들어나가려면 자기 언어로 재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소방방재청은 2006년부터 ‘재난심리지원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재난심리지원이란, 재난 경험자들이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고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하도록 사회·심리적으로 돕는 재난관리 시스템의 일부다. 전국 17개 시·도에 전담센터가 마련됐고, 전문가 2천여 명이 재난심리상담을 맡았다. 하지만 이용자는 적었다. 연 6만7천여 명의 재난 피해자 가운데 2천여 명꼴로 이용했을 뿐이다. 피해자들이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등으로 상담에 소극적인데다 홍보도 부족했던 탓이다. 소방방재청은 오는 7월부터 재난심리상담 전용전화를 ‘1899-6365’로 통합해 운영한다. 2007년 소방안전교육을 받던 학부모 2명이 수백 명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추락사한 서울 중랑구 원묵초등학교 사건을 계기로 정신의학자들도 본격적으로 재난심리지원에 초기부터 결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선진 시스템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다. 미국에는 베트남전 참전군인 등 군대와 관련한 정신적 외상을 주로 치료하는 ‘국립 트라우마센터’가 1989년 일찌감치 세워졌고, 2001년 9·11 테러 이후엔 ‘정신적 트라우마 클리닉’이 설립됐다. 지진 등 재난사고가 잦은 일본에서도 1995년 고베 대지진이 일어난 뒤 ‘마음치료연구소’가 만들어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피해자들을 전담 치료하고 있다. 한국은 재난심리지원(소방방재청)과 이후 트라우마 치료(보건복지부)를 담당하는 정부 부처가 달라, 책임 소재를 놓고서도 혼선이 빚어지는 상황이다.
재난심리지원과 트라우마 치료, 부처 달라
이번 진도 세월호 침몰 사고는 사회적으로도 깊은 상흔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대형 사고를 반복해서 겪는 동안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는 실망감, 언젠가는 나와 내 가족에게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 사회 전체가 집단 우울증 환자로 가득 찬 거대한 병동이 된 느낌이다. 하지현 건국대 교수(신경정신과)는 “사회 곳곳에서 허술하게 넘겨버렸던 문제점들이 차곡차곡 쌓였다가 한꺼번에 빵 하고 터져버린 느낌이다. 누구 개인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매뉴얼이 전혀 없었던 사회 시스템의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 상태가 지속되는 건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심리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시스템 대수술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불안을 가득 싣고 항해하는 ‘한국호’도, 그 배에 탄 우리 모두의 마음도 위태롭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37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