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수업계획 아카이브

[한겨레] “그때도 구명정 안 터졌는데…21년간 나아진 게 없다”

1993년 10월10일 오전 10시 위도 부근에서 110톤급 서해훼리호가 침몰해 292명이 숨졌다. 세월호 사고가 벌어지기 전까지 최악의 해상사고였다. 규정보다 훨씬 많은 승객과 짐을 실어 생긴 전형적인 ‘인재’였다.  자료사진

1993년 10월10일 오전 10시 위도 부근에서 110톤급 서해훼리호가 침몰해 292명이 숨졌다. 세월호 사고가 벌어지기 전까지 최악의 해상사고였다. 규정보다 훨씬 많은 승객과 짐을 실어 생긴 전형적인 ‘인재’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뉴스분석 왜?
서해훼리호 수사검사의 회한
▶ ‘안전불감증’이라는 단어는 더이상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대형참사가 끊이지 않습니다. 리조트에서 엠티를 즐기던 대학생이 숨집니다. 해병대 캠프에서 보트를 타던 어린 학생들이 숨집니다. 사고 원인 대부분은 인재입니다. 언론의 보도경쟁, 정부와 여당의 호들갑, 망각과 무책임의 회로 속에서 다시 애꿎은 고교생들이 숨졌습니다. 이번 침몰은 인재라는 점에서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과 닮았습니다. <한겨레>가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수사 검사와 전화인터뷰를 해 왜 인재가 반복되는지 물었습니다.
20년 전 서해훼리호 침몰 사건을 수사한 검사는 할 말을 잃었다.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는 1993년 10월10일 오전 전북 부안군 임수도 근해에서 벌어졌다. 221명이 정원인데 승객 355명, 선원 7명 등 모두 362명이 탑승했다. 여기에 새우액젓 600여통과 낚시도구, 자갈 7.3톤 등 화물도 규정을 어겨가며 실었다. 배의 무게중심보다 위쪽에 실었다. 복원력(평형상태가 깨졌을 때 다시 평형상태로 돌아가려는 힘)이 약해졌다. 바람이 심했고 파도가 거칠었다. 배는 그대로 운항을 시작했다. 오전 9시50분께 왼쪽 스크루에 해면에 떠 있던 그물이 걸렸다. 선장은 알아채지 못했다. 다시 오른쪽에도 그물이 걸렸다. 속도가 크게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파도가 배를 쳤다. 관리·운항 규정을 지켰다면 사고가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과적으로 배의 복원력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결국 서해훼리호는 오른쪽으로 전복됐다. 사고로 292명이 숨졌다. 이번 진도 침몰 사고가 벌어지기 전까지 최악의 해상 사고였다.
서해훼리호로 많은 것이 바뀐 듯이 보였다. 지금처럼 전국의 모든 언론이 취재 경쟁을 벌였다. 선주, 항만청 공무원, 해운회사 직원 등 4명이 기소됐다. 정부와 국회는 앞다퉈 재발방지책을 내놨다. 한동안 대형 해상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국민들 다수가 그렇게 여겼다. 당시 침몰 사건을 수사한 김희수(55·사법연수원 19기) 변호사도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규정을 무시하는 회사, 관리감독을 하지 않는 관청, 재난 대처의 미숙함. 이 모두가 놀랍게 21년 전 그대로라고 김 변호사는 느끼고 있다.
1993년 서해훼리호 사고 당시 수사검사 맡았던 김희수 변호사 당시엔 바로 해운업체 압수수색 지금 수사팀은 사고 사흘만에 청해진해운 사무실 수사 나서 그때도 구조물품 안전점검 없고 검사 안했는데 검사한 걸로 해 비상식량과 의약품 들어있던 구명정도 하나도 안 터진 비극 지금과 똑같아서 안타깝기만

정원초과운항 확인서 불태워 증거인멸도

김 변호사는 검찰 출신으로 검찰 개혁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변호사로 더 유명하다. 2011년 <검찰공화국 대한민국>(삼인) 등의 저서를 펴내는 등 사회적 발언도 많이 했다. 그는 1993년에 전주지검 군산지청 검사로 서해훼리호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한겨레>가 17일 오후 김 변호사와 길게 전화로 인터뷰했다. 예상되는 법적 쟁점과 수사 전망에 대해 물었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한 소회도 물었다. 김 변호사는 “21년간 나아진 게 없다”고 한탄했다.
당시 수사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말을 시작했다. “당시 4명을 기소했습니다. 서해훼리 주식회사 선주와 직원, 관리 감독 책임을 진 항만청 공무원 2명 등이었습니다. 선주는 제가 직접 조사해서 다 기억이 납니다. 4명을 기소했죠. 선장은 사망했습니다. 당시 검찰이 ‘귀신 잡는 검찰’이라고 욕도 얻어먹었습니다. ‘선장이 살아 있다’는 제보가 주민으로부터 자꾸 들어왔거든요. 무시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지명수배를 내렸습니다. 결국 해프닝이 됐습니다. 당시엔 선장이 사망해서 선장에게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를 적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게 지금과 다른 점입니다. 어찌됐든 당시 상황에서 서해훼리 선주의 책임은 행정책임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배를 직접 몰지 않은 선주이므로 법적으로 구체적 주의 의무는 없고 추상적 지휘책임만 있어서 과실치사상 혐의를 선주에게 적용하는 것은 법리상 불가능했고 행정책임만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법 268조(업무상과실·중과실 치사상)는 ‘업무상과실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사람을 사상에 이르게 한 자는 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서해훼리호 사건 때도 아까운 목숨이 사라졌다. 부서 야유회로 낚시여행을 떠났던 공무원이 숨졌고, 휴가를 다녀오던 군인이 숨졌다. 과실이 치사상을 불렀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인재’라는 점에서 지금 침몰 사건과 유사성이 많이 드러난다. 첫째 서해훼리호 선장 백운두씨는 날씨를 무시했고 감독할 사람들은 이를 막지 못했다. 사고가 벌어진 날 북풍이 초속 10~14m로 강했다. 파고가 2~3m였다. 당시 ‘여객선 운항 관리 규정’상 출항 정지 조건은 풍속 초속 12m, 파고 2.5m였다. 선장은 출항하지 않고 그 이유를 해운조합에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의무는 지켜지지 않았다. 군산지방항만청 공무원은 나태했다. 피서철이나 명절에 서해훼리호가 낚시꾼들을 초과 승선하는 현실을 공무원들도 알고 있었다. 선장 백씨에게 그전에도 4차례 정원초과운항 확인서를 발부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문제를 지적했을 뿐 시정을 강제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들에게 비난이 돌아올 것을 우려한 항만청 직원이 정원초과운항 확인서를 불태우는 증거인멸 사건도 벌어졌다. 수사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도 드러났다. 1990년 건조 당시 선체복원력을 테스트한 기술용역업체가 무자격 업체임이 드러났다. 언론의 질타와 정치권의 반성이 이어졌다. 검찰은 선주 유동식 사장의 아들이자 실질적 경영인인 유희정 상무를 구속기소했다. 수사가 마무리된 뒤 유족들이 국가, 해운회사 등을 상대로 여러 건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서해훼리호는 조사 뒤 고철로 팔렸다.
“이번 사건을 보며 안타까운 것이, 그때(서해훼리호 사건)하고 똑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언론 보도를 보면, 구조물품 안전점검을 회사가 반드시 하도록 되어 있고 그것은 안전의 필요조건인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때도 그런 게 전연 없었고요, 검사도 안 하면서 전부 다 검사한 걸로 되어 있었죠. 그러나 사고가 나자 막상 하나도 (구명정이) 안 터졌죠. 구명정에는 비상식량과 의약품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번에도 구명정이 안 터졌다는 보도를 봤습니다. 대체 20여년 전하고 뭐가 달라졌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장에 ‘미필적 고의’ 적용 고려해 볼만

선장 백씨는 사고 당시 승객과 함께 숨져 직접 처벌받지 않았다. 주민들로부터 선장이 살아 있다는 제보가 이어져, 수사팀 내부 논의 끝에 한동안 지명수배를 내리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선주, 항만청 직원, 해운회사 직원에 대한 형사처벌은 당연한 것이었다. 전형적인 ‘인재’였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지른 자에 대한 수사, 기소, 형사처벌이 이어졌다. 김 변호사는 생존자가 극히 적어 참고인이 부족한 상태에서 수사를 이끌었다. 수사의 성공은 초동대처에 있었다. 김 변호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뒀다. 사고 당일 저녁 곧장 해운업체를 긴급히 압수수색했다. 혹시 해운업체가 사고와 관련한 문서를 파기할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세월호 선장이 도덕적으로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요, 선장은 어떤 결과가 예측되는 상황에서 그 선박을 지휘하고 결과 발생을 회피해야 할 의무가 있거든요. 주의의무가 있습니다. 보도를 보면, 세월호 선장은 그걸 전혀 안 한 것으로 보입니다. 법률적 용어로 선장에게는 ‘결과회피 의무’ 내지 ‘일정한 행위 의무’가 있는데 ‘부작위’를 저지른 것이지요.”
보통 사람들은 범죄를 악한 행위를 저지른 행위로 인식한다. 마땅히 행할 행동을 하지 않는 ‘부작위의 죄’는 악행을 저지른 죄만큼 크다. 의무를 진 사람이 마땅히 의무를 행동해야 할 때 가만히 있는 것은 죄악이다. “나아가 세월호 선장에게 ‘미필적 고의’까지도 적용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가 발생하리라는 예측이 있으면 그에 따른 구호조치를 구체적으로 해야 하는데 ‘인식하면서 안 했다’면 미필적 고의 법리 적용을 고려해볼 수도 있습니다. 세월호 선장이 단순한 업무상 과실치사상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이는 현재 수사 담당자들이 밝혀야 할 부분이겠지요.”
김 변호사의 의구심은 현실로 증명됐다. 당시 항만청이 서해훼리호를 점검하면서 정원초과 확인서를 4장 발부해 항만청에도 보관하고 있었다. 당시 군산항만청 해무계장 김아무개씨는 침몰 사건이 벌어지자 두려워했다. 검찰로부터 항만청 직무수행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받았다. 당시 항만청은 여러 차례 서해훼리호 선장에게 정원초과운항 확인서를 발부한 상황이었다. 발부 뒤 아무 조처를 취하지 않은 사실이 적발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김씨는 10월 중순 부하 직원에게 확인서를 태워 없애라고 지시했다. 직원은 항만청 소각장에서 확인서를 불태웠다. 사죄해도 모자란 국면에서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김 변호사는 앞으로 검경이 증거 확보에 주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누구의 과실인지에 대한) 가장 결정적 증거는 선박이 인양되어야 확실해진다고 봅니다. 선박은, 자동차도 마찬가진데요, 무게중심이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불안해집니다. 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무게중심이 밑에,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한 밑에다 화물을 실어야 안전합니다. 선박은 밑에다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또한 (배에 실은) 자동차와 화물은 정확히 위치 고정을 시키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지금 보도를 보면 타성에 젖어서 (고정을) 안 한 것 같습니다. 그게 확인되면 굉장히 중요하게 (재판에서) 작용할 겁니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건 증거 확보입니다. 선박이 인양되는지 여부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적어도 초동수사의 측면에서 진도 침몰 사건을 수사중인 현재 검경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이성윤)는 1993년 당시 김 변호사보다 손이 느리다. 합동수사본부는 광주지검 목포지청에 만들어졌다. 김 변호사는 사고가 벌어진 당일 해운회사를 긴급 압수수색했다. 현재 검경은 사고 발생 사흘째인 18일에야 청해진해운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해운업체의 서류증거 파기 막아야

“당시 해운회사가 선박에 관한 서류들을 파기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찰에 수사지휘해 (해운업체를) 긴급 압수수색을 했습니다. 지금 수사기관에서 어떻게 수사하는지 모르겠지만, 증거를 빨리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인회사이거나 주주가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걱정스럽습니다. 그때는 운이 좋았습니다. 수사 경험이 많은 베테랑 경찰을 파견받고 있었습니다. (서해훼리호)사건 당일 저녁에 바로 압수수색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유족들이) 해운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민사소송을 냈을 때 형사재판 기록만 보고 법원에서 책임을 인정하게 되었죠. 돌아가신 분들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궁극적으로 가면 결국 법적 문제가 생길 것이고, 형사적·법적 책임을 가리거나 책임을 추궁할 때 중요한 게 증거입니다.”
지금 검경이 확보한 문서 한장이 훗날 책임져야 할 사람을 형사처벌하고 숨진 승객 유가족들에게 손해배상이 이뤄질 근거자료가 될 수 있다는 취지다. 그 중요한 자료를 현재 검경은 사고 사흘 뒤에야 확보하기 시작한 셈이다.
선장이 있고 없음은 앞으로 수사에서 중요한 차이다. “세월호 선장이 생존해 있다는 점은 수사의 편의성 측면에서는 유리합니다. 서해훼리호의 경우 292명이 숨졌습니다. 선장과 승조원이 숨져 별다른 참고인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기존 자료와 선박 인양 조사 결과, 시뮬레이션 결과를 토대로 수사했습니다. 이번 침몰 사고는 그나마 생존자가 있고 선장이 살아 있는 점이 수사에 유리한 조건입니다. 신속하고 꼼꼼하게 수사해야 합니다.”
김 변호사의 목소리는 인터뷰 내내 가라앉아 있었다. 1993년으로부터 아무 교훈을 얻지 못한 현실이 그를 통탄하게 만들었다. 그는 망연자실해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생들이 엠티 갔다가 아까운 목숨이 숨지고 청소년들이 해병대 캠프에 갔다가 숨지고…. 과거 씨랜드 참사(1999년 청소년수련원이 불타 어린이들이 숨진 사건)도 그렇고요. 가슴이 아픕니다. 전부 인재입니다. 성수대교 사건도 인재고요. 근본적으로 이런 사건들을 보고 ‘우리 사회가 아직도 교훈을 못 얻고 있다면 어쩌자는 것인가’ ‘문명국가라고 할 수 있나’ ‘이런 야만이 왜 반복되는가’ 자문하게 됩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2014.04.19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349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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